여행 느낌/2020제주한달살기

7살 아들과 아빠의 제주 한달살기 - 첫째날

라만차의 풍차 2021. 10. 25. 00:04

2020. 6. 15

연우와 제주도로 떠나는 첫날이다.
아침일찍 녹동항에 도착해서 배에 차를 실었다.
원래 가족은 차에서 내리고 운전자만 배에 차를 실어야 하지만, 아이밖에 없다는 설명에 함께 갈 수 있었다.
배에 차를 싣고 배에서 걸어 나오는 길은 차가 계속 드나들고, 조금은 좁고 위험하기 때문에
아이한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녹동항에서 수속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연우


터미널로 연우와 걸어나와 차량비용을 정산했다.
차를 실으려면 출발 1시간 반 전에는 와야되기 때문에 기다리기가 좀 지루했다.
녹동항 안에 매점에서 혹시 모를 멀미가 있을까봐 멀미약을 사 먹었다.
멀미약은 약간 썼지만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
이후 8시 40분경부터 배를 타고, 9시에 배는 서서히 녹동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리를 지나갈 때 즈음 배는 뱃고동을 시원하게 두세차례 울린다.
정말 떠나는구나 싶고 기분이 오묘하다.

지나가는 작은 쾌속정을 보면서 연우가 '이 배가 느리다'면서 투덜거리며 생떼를 쓴다.
나는 '이 배는 느리지만 기름통이 커서 아주 멀리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계속 투덜거리며 '아빠랑 괜히 왔다', '이 배는 왜이래'
라디오 틀어놓은 듯 같은 말을 계속하는 연우.

슬슬 피곤해 지려는 찰나, 다행히 쾌속정은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갔다.
이후 '아빠 말이 맞네, 우리가 이겼다'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아직 애는 애다 싶다.

녹동항을 떠나면서


녹동항을 떠나고 나니 바다만 보이고, 심심해서 배 안으로 들어왔다.
배 안에는 작은 매점이 있었는데, 라면, 김밥, 과자, 아이스크림들을 사 먹을 수 있었다.
연우는 오레오를 먹고, 나는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라면을 시켜먹었다.
이후 연우는 핸드폰도 하고, 책도 읽고, 태블릿을 보다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가져온 푹신한 매트와 요를 덮어주니 이내 연우는 잠이 들었다.

3등석에서 매트는 필수다. 우리의 영역(?)을 주변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표시할 수 있다.


나도 잠은 왔지만 자고싶진 않았다. 내 인생에 언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한달동안 잘 지낼 수 있을까? 잘 먹일 수 있을까?
설레임과 걱정을 하다 밖에 나가보니 나의 복잡한 심경과 달리 풍경이 참 좋았다.

말 그대로 망망대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선실로 잠깐 들어가 눈을 붙였지만 이내 눈이 떠지고 만다.
고작 한달살기 하러 배타고 가는 기분도 이렇게 싱숭생숭한데,
해외로 이민은 어떻게 가는걸까? 생각이 든다.
그렇게 멀뚱 멀뚱 연우 담요를 덮어주고, TV를 보다, 핸드폰을 보다, 밖을 들락날락 하다보니
어느덧 제주도가 눈에 들어온다. 아 진짜 오긴 왔구나..

멀리 보이는 제주도... 이때의 기분은 무언가 등골을 간지르며 내려가는 느낌.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선내 방송에서 차를 하역하는 분들은 내려오라고 안내한다.
그 소리에 연우도 깨고, 주섬 주섬 연우와 함께 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 배가 항구에 접안할 때 까지 기다렸다.
차를 배에서 내리며 코로나 관련하여 간단한 열 체크를 하고, 항구를 빠져나오니,
제주항 인근의 도로 주변 야자수 부터 여기가 '제주도' 라는 것을 각인 시켜 준다.

차에 짐이 많아 숙소인 협재 해변으로 바로 갈까 싶었지만,
체크인이 오후 3시라 시간에 여유가 있어 가끔 스쳐지나가던 곽지 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곽지해수욕장은 촉박한 일정에 잠시 들러 '아 여기가 곽지구나' 하고 아무런 감흥 없이 지나갔던 곳이다.

그런데, 시간의 여유가 주는 곽지의 풍경은 새로웠다.
곽지는 너무 아름다웠다.
협재만큼은 아니었지만 여행에서 처음 접하는 제주도의 바다는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다.
흰 모래는 부드럽고, 광활했고,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사람들은 여행자의 분위기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고, 모두가 여유로워 보였다.
서핑을 하는 젊은이들은 그들대로 열정을 뽐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휴식 그 자체였다.
6월 곽지 해변의 햇볕은 뜨거웠지만 따갑진 않았고 선선한 바람이 너무나도 좋았다.

연우에게 미리 챙겨온 선그라스, 썬캡을 씌우고 배도 고플 것 같아 과자도 쥐어주고 한참을 구경한다.

곽지해변, 여행의 첫걸음


곽지해변에는 신기한 것도 있었다. 지하수가 모래사장에서 분수처럼 뿜어져나온다. 용천수라고 하나?
물은 매우 차갑고 민물이라 마실수도 있다. 용천수는 현무암을 지나 모래를 뚫고 올라오는데,
좀 큰 공간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기때문에, 그 위에 발을 올리면
마치 뻘에 몸이 잠기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연우는 발을 넣었다 뺐다, 주변을 뛰어다니며 신기해 했다.
안을 헤집으면 미역이 올라오기도 한다.

어떤 곳은 구멍이 매우 큰데, 아주 작은 아이한테는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연우도 뛰어가다 구멍에 발이 깊숙히 빠졌는데,
잘못하면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크게 놀랐었다.

지하수가 뿜어져 나오는 곽지의 모래사장


그러더니 이유도 없이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어디가? 갑자기 왜?'
'끙아 마려..' '....'

갑자기 화장실로 냅다 뛰는 연우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곽지 투썸플레이스 방문
비움이 있으면 채움이 있어야 하기에...

알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케잌을 먹으며 방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첫날인데.. 연우와 이렇게 얘기가 잘 되었나? 갸우뚱 한다.
아침만 해도 생떼를 쓰고, 태블릿에 목을 맸는데, 이런 저런 얘기가 이어져 나가는게 다른 아이같다.
내가 그동안 연우와 대화할 시간이 없었던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긴, 그동안 회사 다닐때는 매일같이 야근이었고,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과제 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연우를 그동안 너무 몰랐고, 대화가 없었던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 꼭 친구처럼 대화가 이어져 나갔던 첫날


곽지해수욕장을 정리하고 숙소에 체크인 한다. 숙소는 협재에 있는 타운하우스, 브리타니를 계약했다.
협재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깔끔하고, 복층구조에 방3, 욕실 2, 거실겸 주방, 2층 테라스가 있는 멋진 집이다.
당시에는 약 220만원? 줬었던 것 같은데, 상당한 가격이지만 와이프가 언제 이런 기회가 있겠느냐며
추천해 줬고 결론적으로 너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마당 입구에 주차장이 있는게 너무 좋았다. 내 집 앞에 차를 대고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신선한 느낌이었다.
연우는 오자마자 쇼파에 앉아 TV를 한참 보고,
이곳 저곳 구경을 시작한다.

거실 구조는 이렇게 생겼다.


연우는 2층 공간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1층과 2층을 마음껏 뛰어 논다.
쿵쿵 거리며 뛰어 다녀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게,
아파트에만 살아오며 아이 발망치 소리에 고함을 치던 나에게는 느낌이 참 이질적이었다.

연우는 복층 집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복층은 은근히 운동(?)이 된다.


뒷문을 열면 바로 초록초록 공간과 테이블이 펼쳐진다.
한달동안 여기서 볕을 쬐고, 여기 누워 자는 고양이를 보고, 별을 보고, 고기를 구워 먹었던 소중한 곳이다.

문 앞 주차장, 마당과, 잔디, 테이블은 단독주택의 큰 장점이다


집을 둘러보고 짐을 정리하는데 한 짐이다.
제주도는 음식이 비쌀거라는 생각에 육지에서 아이스박스에 먹을 것, 생수를 가득 챙겨왔는데 우습게도 그 비싼 삼다수가 제주도에서는 엄청 쌌고, 고기, 라면, 기타 음식류나 생필품도 육지와 큰 다름이 없었다.
특히 협재 근처에 하나로마트에 자주 가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짐들을 바리바리 싸왔는지 살짝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대충 대충 짐을 정리하고, TV를 보고 있는 연우를 달래어본다.
'연우야 바다 가자'
동네도 익힐 겸 걸어서 협재바다로 간다. 5분쯤 걸으니 협재바다 언덕이 보인다.
언제 들고 왔는지 연우 손에는 손부채가 들려 있었는데, 언덕을 보자마자 '바다다'라면서 뛰어 올라간다.
멀리서 보던 나도 언덕 너머 풍경을 한껏 기대하며 쫓아가는데 연우의 실루엣이 너무 멋지게 다가와서 찰칵
이날부터 협재의 석양에 푹 빠져버리고 만다.

와! 바다다!

협재 바다는 사실 워낙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곽지처럼 지나가다 한번 슥 보고 지나가던 곳이다.
그때도 예쁘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여유를 갖고 석양을 기다리며 보니 너무나도 멋진 곳이라는 걸 체감했다.
석양은 늬엿 늬엿 지고, 연인, 가족, 친구끼리 추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모습이 예뻤다.

여유를 가지고 협재의 석양을 보면 항상 마음이 설레게 된다.

연우는 신이 났다. 협재 CU 편의점에서 들려주는 댄스음악에 부채춤을 춘다.
아직은 개장 전 정비중인 공사판 배경과, 아름다운 석양과, 시끄러운 댄스음악에 부채를 들고 막춤을 추는 연우..
살짝 부끄럽지만 마음껏 비웃어주며 동영상을 찍어 둔다. 나중에 부끄러움은 너의 몫이겠지.

협재 편의점 CU 앞에서 신이 나 부채춤을 추는 연우

그렇게 첫날 일정은 끝이 났다.
집에 들어와 연우를 씻기고, 연우와 첫 만찬으로 동그랑땡과 밥을 먹고, 일찍 잠에 들었다.
'1층에 잘까? 2층에 잘까?'
'난 2층이 좋아!'
'그래? 그럼 2층에 자자. 2층이 왜 좋아?'
'그냥 좋아'
찰싹 붙어서 졸졸졸 따라다니는 연우가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의지할 곳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빠 밖에 의지할 곳이 없으니 불안한가 싶기도 했다.

2층 방의 조명은 은은했고, 창밖은 협재쪽의 불빛이 하늘에 스며들어 적당히 예뻤다.
2층 침대에 누워 엄마가 신신당부한 책읽기를 시작하자 마자 잠이 든 모습을 보니
내 새끼지만 참 이쁘다 싶다. 지켜주고 싶다. 잘 커 줬으면 좋겠다.
엉덩이를 토닥거려 본다.

연우를 재우고 잠깐 2층 테라스에 나와보니 나도 모르게 수년간 끊었던 담배가 살짝 생각났는데,
무사히 도착했다는 생각, 내일부터 신나는 날이 될 거라는 기대,
한편으로 지나온 날들도 되새겨 보고,
지금 행복이 1달밖에 안남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까지..
여러가지 복잡미묘한 생각이 휘몰아 쳤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첫날은 지나가게 되었다.